2022 02 25~ 02 26 엄마와 안국산책 & 세정이 생파



아직 연차 소진중이기는 하지만, 퇴사 후 첫날은 엄마와 안국을 돌아다니며 보냈다. 전시를 볼까 하고 이것 저것 찾아봤는데, 처음엔 샤갈전이 나와 엄마의 취향을 모두 반영하고 있어서 갈까 했다. 그런데 너무나 새 회사 코 앞이 전시관이었던 것. 아직 2주의 휴식기간이 있는데 회사나 일이나 기대에 부응해야한다는 압박감, 지난 일주일간의 불면증 등등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에 갈 맘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탈락시키고 다른 놀거리를 찾아봤다. 그러다 나훈아의 두번째 신곡 뮤비를 민지가 보내줘서 엄마랑 같이 봤다. 엄마에게 나훈아파인지 남진파인지 물었더니, 답은 안했지만 은근히 나훈아파인 것 같았다. 신곡 두개 뮤비 다음에 엄마가 요청한 테스형까지 주르르 함께 보았다. 나는 나훈아가 80은 먹은 줄 알았는데 아빠와 10살도 나이차이가 나지 않는 다는 걸 알게됐다. 아빠도 할아버지가 다 됐지 뭐.
갑자기 이전부터 가고싶지만 미뤄둔 어둠속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고 당장 예약 가능한 시간이 있나 찾아봤다. 마침 오후에 두 명 예약이 빈 때가 있어서 후다닥 예약했다. 한 시간 쯤 여유있게 나가 종로3가에서 안국 넘어 전시관까지 슬슬 걸어다니며 여기저기 둘러봤다. 엄마는 신혼집을 재동에서 시작했고, 처녀시절 무역회사의 경리 일을 광화문에서 했다. 20대의 엄마는 심부름을 나갔다가 공짜 전시도 보고 골목길 가게들도 구경하며 놀다 들어가서 그 근방을 빠삭히 외워뒀다. 네비가 없으면 사실상 지구미아인 나와는 너무 다르다. 엄마는 네비도 안 보고 척척 방향을 찾았다.
오브젝트에서 세정이 생일카드로 쓸 카드도 샀는데, 깜빡해서 주진 못했다. 3월 생일인 다른 친구들에게 써야겠다. 엄마한테 커플링을 하자 했는데 구경만 하고 사진 않았다. 엄마 손에 웬 쭈그렁 은색 반지가 있어서 이건 어디서 샀냐했더니 내 귀에다 대고 주웠다고 속삭였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에서 집까지 오는 길 중 차만 다니는 뒷길이 있는데, 그 길은 지름길이지만 담배피는 사람이 많고 가로등도 잘 안 되어 있어서 나는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엄마는 저녁 기도회를 갔다가 집에 올 때 꼭 그 길로 다닌다. 거기서 누가 잃어버리고 간 반지를 주웠단다. 쭈그렁 반지가 웃겨서 새 반지를 사 주고 싶었지만 맘에 드는 것이 없어 관뒀다. 압화 노트가 정말 예뻤는데 엄마가 집에 꽃도 많으니 직접 만들면 되겠다고 했다. 이것도 노트가 2만원이라니 너무 비싸다며 사지 말라했다. 그래서 생일카드만 사고 나왔다.
엄마는 isfp인데 Se외향감각이 부기능이라 infp인 나와 완전 다르게 사물을 본다. 어디서 본 s/n차이 글이 생각나서 엄마에게 '씨앗'을 설명해보라 했더니, 뭐 씨앗은 씨앗이지, 호박씨, 꽃씨, 무슨씨 하면서 완전 Se같은 답만 했다. 난 씨앗하면 뭐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이나 그 안에 있는 생명력 같은게 생각난다, 엄마랑 나는 n/s 하나만 다른데 정말 다르다 그런 얘기도 하면서 걸어다녔다. 나는 mbti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특히 부모님을 이해하는 도구로 쓸모 있어서 좋아한다. 어릴 땐 엄마(isfp)아빠(estj)가 왜 그러나 싶었던 것들을 지금은 납득할 수 있고, 부모님의 어떤 반응들에는 상처받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게 됐다.
**아래에는 어둠속의 대화 스포가 있습니다, 중요한 스포일러이니 혹시 예약했거나 후에 관람 계획이 있다면 더 읽지 말아주세요**
한 시간을 넘게 주변을 돌아다니고 어둠속의 대화에 도착했다. 사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 뭔가 어둠속에서 참여자와 진실한 대화를 하게 도와주는 그런 프로그램일 줄 알았다. 지난 달 그 역병에 걸리고 말았던 엄마와 그 때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난 정말 엄마가 죽을까봐 너무 무서웠다. 엄마도 입원해서 무서웠을 텐데. 그 기간은 엄마와의 관계에서 마일스톤 같은 거라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프로그램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기대하지 않은 방향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고 100분간을 다니다보니 믿을 수 있는 공동체 비슷한 것 처럼 느끼게 된 것이 좋았다. 요즘 각박하고 말도 안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서 그런지 이런 느슨한 친밀감에도 인류애가 샘솟았다. 어떤 커플과 같은 팀이 되어서 물건을 맞추는 게임을 했는데 나는 프리라이더였고 (정말 단 하나도 못 맞췄다. 난 시력을 잃으면 끝났다고 보면 된다.) 엄마가 절반은 맞췄고 커플 중 여성분이 하드캐리해서 우리가 위너가 됐다.
엄마가 가이드님은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안내하시냐 질문했는데, 소름돋는 반전이 있었다. 가이드님은 시각장애가 있는 나보다 한참 어린 청년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직원들은 어둠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안경을 쓰고 있을줄 알았는데. 엄마는 적응이 됐다 했지만 나는 사실 내내 너무 답답했다. 라섹수술을 하고 4일간 눈을 못뜨고 살 때 생각도 났다. 걷는 것을 주춤거릴 때 가이드분과 엄마가 잡아서 도와주면 그게 그렇게 큰 위안이 되었는데. 눈이 보여도 각박하다 느끼는 세상을 보지 못하면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잡아주는 도움은 또 얼마나 크게 와닿을까. 그걸 기억하며 앞으로 살아야지.
또 기억에 남는 것은 막판에 음료수를 구분하는 체험. 내가 마신 것은 엄청나게 단 복숭아향 음료였고 난 분명 아는 맛인데도 도통 답을 생각해 내지 못했다. 답은 쥬시쿨이었는데, 난 단 음료를 안 마시기 때문에 브랜드명이 떠오르지 않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종이팩에 들어있지 않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알고 있다 믿는 것들이 감각을 벗겨내면 모호해 진다는 것이 놀라웠고, 좀 더 진리에 가까워지려면 감각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프로그램 시작때부터 엄마한테 배고프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100분이 지나 끝날때쯤엔 배고프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배고팠다. 엄마도 동의했다. 원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햄버거를 먹기 위해 다운타우너를 갈 예정이었지만, 막상 가 보니 줄을 한참 서야했고, 우리는 그따위 빵쪼가리를 위해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그래서 눈 앞에 보이는 건너편 국밥집으로 향했다. 어떻게 길을 건너갔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밖에 붙은 메뉴 사진에 침흘리며 엄마는 보쌈정식을 하고 나는 국밥을 해서 같이 나눠먹자 얘기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직원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가게 사정때문에 일찍 마감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왜요!!!!!! 우리가 너무 배고파보였는지, 직원이 술 마시지 않을건지를 확인하고 가게안에 들어가서 우리의 주문을 처리해줬다. 감사하게도 직원분이 아는 사람인 척 해서 마지막 주문을 받아주신 것이다. 지구 서쪽에서는 전쟁이 나고, 나라 안은 역대급 끔찍한 대선후보들로 속이 답답한데 이 날은 그럼에도 인간을 혐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을 발견한 날이었다.
뜨뜻한 국밥과 보쌈으로 몸을 데운 엄마와 나는 소화를 시킬겸 종각역까지 걸어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꾸벅꾸벅 조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vlog를 편집했다. 거창한 vlog는 아니고 릴스로 만든 짧은 영상인데도 너무 힘들었고 마음에 안 찼다. 올렸다가 바로 지워버렸다. 집에 와서는 10시에 잠들었다. 간만에 불면증도 없는 꿀잠이었다.
세정이의 생일은 2주가 밀려서 하게 됐다. 원인은 내가 주말에도 출근했기 때문이지! 와하하하🥲 우경이는 원이를 봐야하니 내가 30분 일찍 가서 요리를 하기로 했다. 사실은 조리지만.. 전날 우경이와 상의해서 마켓컬리의 유명한 밀키트들을 샀는데, 우리가 너무 많이 산건지 나중엔 음식이 많이 남았다.
사실 친구들에게 밝히지 않았지만, 생일선물을 집에 두고 와서 다시 집으로 갔다가 택시비 4만원을 넘게 내고 우경이네 집에 도착했다. 딱 약속한 시간에 맞춰 도착했기때문에 이야기하지 않고 마음껏 (일찍와서 요리를 한) 생색을 냈다.
원이는 벌써 1살이 되어갔다. 안 그래도 아기가 있는 친구들은 자주 못보는데 그 역병 때문에 더 자주 못 보고 살아서 아쉽다. 우경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나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 오고 있는데 요즘 내가 자주 우울했던 건 삶에 우경이가 부족해서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멀리 산다. 우경이의 요즘 이야기는 내가 모르는 것이 많다. 어릴땐 친구들의 요즘 이야기를 모르는 것이 많이 서운했는데 이제는 서운하지는 않다. 그냥.. 내가 안 봐서 잘 모르는 드라마 내용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일일이 서운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각자 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세정이도 마침 이직을 하는데, 장애인 거주시설의 회계팀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편견이나 잘못된 생각이나 그럼에도 생기는 두려움 같은 얘기를 하다 어둠속의 대화 이야기도 했다. 스포을 말하면 안 되지만 이야기 해도 된다해서 말했더니 둘 다 반전에 깜짝 놀랐다. 아마 알고 가도 의미 깊을 것이라 괜찮겠지.
우리는 정말 배가 터지게 먹고, 생일파티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지만 시선은 계속 원이를 따랐다. 나는 아이를 잘 못다루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계속 걱정되고 눈이 갔다. 우경이가 아기 엄마라니 아직도 신기하고 안 믿긴다. 그냥 갑자기 어디서 떨어진 아이같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바쁜걸까. 찌푸리면서 울다가 왜 갑자기 순식간에 웃는걸까.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과 아이가 신기하고 무섭다. 내가 잘못할까봐도 무섭고, 동물들은 갑자기 공격할까봐도 무섭다. 사실 말을 할 줄 알아도 무슨생각 하는 지는 모르는 건데... 나는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나보다. 그래서 친구들의 아기들이 빨리 말을 할줄 알게 되고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말해주면 더 친해 질 수 있을 것 같다.
일기를 쓰다보니 너무 길게 썼다. 내일부터 도파민 디톡스를 다시 시도해보려 한다. 왜냐면 도파민 디톡스를 그만두자마자 밀렸던 sns, 인터넷, 넷플릭스, 유튜브를 미친듯이 하느라 일기도 안쓰고, 디저트와 커피는 하루 3번먹고, 뇌는 약간 도파민 탕에 끓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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